radical

 

 

 

비지니스 계열이나, 전화로 업무하시는 분들의 필수 아이템이죠.^^

통화를 녹음해야 하시는 분들에게 강추 드리는 앱입니다.ㅋ

 

물론 요즘 국내 스마트폰은 녹음 기능이 있지만

문제는 녹음버튼을 눌러야만 녹음이 가능하다는게 함정이죠^^;;

 

automatic call recorder는 자동녹음이라는 설정을 가능케 만들어줍니다.

녹음 할 생각 않고 통화하다 끝난 후 내용을 다시 듣고싶을때 좋더군요.

지정한 기간이 지나면 알아서 파일 정리해주는 기능도 맘에 들고!

무엇보다 깔끔하네요. 음질도 좋고, 기대가 되는 앱입니다.

 

앱을 설치하면 2주 동안 아무런 제약없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설치해서 사용해보시면 좋을꺼 같네요.^^

 

구입주소입니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globaleffect.call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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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466407576 2016.06.20 16:26

    제 블로그도 놀러오세요~

지난번 윈도우7을 어처구니없이 날린 이후로~
피댕이와 아웃룩 싱크가 이상해졌다.

계속, 서로 싱크가 안되고-
에러나고 짜증지수 팍팍팍 올라간다....ㅠ.ㅠ

윈도우7의 문제인지... 아웃룩의 문제인지 감은 잡히지도 않고-
아우....

화딱지 나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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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C:\Program Files\Common Files\Hnc\Shared\HwpTemplate\Doc\Kor
    으로 고고씽ㅋ!!~~


② 들어가셨다면 그림과 같은 NORMAL파일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찾으셨다면 기쁜(?) 맘으로 재빨리 더블클릭 합니다.

 

③ 불러온 NOMAL한글 문서에 자신이 원하는 글꼴로 바꿉니다.
 

 

④ 자아 이제 거의다 끝났습니다.
    글꼴을 바꾸신 후 저장을 하시고... 파일을 닫으시면 됩니다.


⑤ 이제 확인 작업만 하시면 됩니다.
    " 한글2007로 더블클릭해서 새창을 불러와 보세요."
    기본 글꼴이 바뀌신걸 확인 하실수 있으실 거예요.

    --- 네이버 지식인에서 퍼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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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Discovering Your Destiny

플로이드 맥클랑 지음 | 예수전도단 옮김 | 46 양장 94 | 5,000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나님을 위해 전심으로 살아갈 때,

그분의 인도하심을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양한 선택이 가능한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좋을지, 어느 곳에서 살아야 되는지….

이 책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준비하고 점검해야 할 것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저자 소개

플로이드 맥클랑YWAM의 전 국제 책임자이자 대표적인 강사다. 현재 YWAM의 풀타임 사역자는 아니지만, 매년 세계 각국의 각종 YWAM 행사(DTS 강의도 포함하여)에서 강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하나님과의 친밀감」, 「당신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어떻게 죄를 이길 것인가?, 「친구 관계를 통한 효과적인 전도」,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삶」이 있다. 책 제목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가르침과 저서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주제는 하나님과 그분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깊이 있는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그것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친밀감은 이미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섬세하고 따뜻한 통찰력으로 전해 왔다.

YWAM의 선교 분야에서 기초를 놓은 선구자 중 한 명인 그는, 1967년 아내 샐리와 함께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역을 개척했고, 1973년에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도시선교를 시작했였다. 1992년에는 YWAM의 국제 책임자를 사임하고 교회 개척 사역을 시작하여 올네이션스 펠로우십을 설립했다.

지금은 셀 중심의 메트로 크리스천 펠로우십(Metro Christian Fellowship)을 담임하며, 아내와 함께 남아프리카 YWAM의 아프리카 교회 개척 사역을 돕고 있다.

 

목차

서문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 / 충성된 자를 부르신다

각자의 성격과 재능을 고려하신다 / 특별한 인도하심

마음을 열고 순종할 때



1.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은 마치 고층 빌딩의 유리 같다. 유리는 필요한 것이지만 그 자체로는 빌딩을 지지할 수 없다. 그것을 받쳐 주는 내부 구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지지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건한 성품과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이런 원칙에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그분의 뜻을 더 깊이 알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필수 조건이다.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먼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는 것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이다. 믿음이야말로 신앙의 기초석이며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와 교제를 갖기 원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낸 이유이다.

 

자신을 100% 드리는 것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 조건 없이 전적으로 헌신하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그렇게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만큼 확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유일한 하나님이심으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던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 그분의 놀라운 성품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으며 그의 성품과 우리 삶에 대한 그분의 뜻에 대하여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전부를 원하신다. 신앙은 한가롭게 천천히 헌신하거나 매년 헌신을 증가시켜 마침내 100% 헌신을 이룩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99%만 내 삶을 드렸다 해도 여전히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을 100% 드렸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온전히 삶을 드려 '어떤 것, 어느 때, 어떤 곳에서도 주님을 의지합니다.' 하는 고백을 들으실 때 비로소 우리 삶에 대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온전히 인도하실 수 있다.

 

잃어버린 자를 사랑하는 것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잇는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담당해야 할 임무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신 개성에 따라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개발하여야 하며, 우리에게 알맞은 방법을 보여주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 속에 선한 일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주 형편없는 것이다. 우리는 주신 상황 속에서 선한 일을 하고 있는가? 선한 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친구의 아이를 돌봐 주거나 기온이 떨어진 아침, 이웃집 차의 시동을 걸어주는 일 등 작지만 값진 일이 많다. 이웃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하라.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

기도와 성경공부는 믿음이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당신을 계시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직접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하는 법과 중보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좋은 책을 보는 것이나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규칙적인 성경공부를 시작한다면 주님과 더 친밀하고 안정감 있는 교제를 갖게 되며 성경을 신뢰하고 성경 안에서 삶의 해결책을 찾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 생명을 풍성히 누리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스스로 먹을 수 있는 영적으로 성숙된 사람이 되길 바라시며 어떤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정부의 권위에 순복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도 우리를 통제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세상의 법이 하나님의 법과 상충된다면 우리는 세상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마땅하다. 절대적인 순종이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정부의 권위에 위배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불의와 부정부패, 편견과 음란, 압제와 기타 죄악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사랑을 가지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가진 힘이다.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는 동시에, 그들의 악과 부패한 제도에 대하여는 복종하지 않으며 온유한 태도를 견지하고 사랑으로 저항하며 이에 맞서 완강히 거절하는 것이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성장하는 것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4)”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흔히내가 참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가?’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감수해야만 하는 때가 있다. 하나님의 우리의 인격을 다듬는 하나의 방법으로 이런 어려운 상황을 사용하신다. 이런 역경이 없이는 결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근육을 단련시키기 위한 갖가지 난관과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이런 고난의 시간을 결코 피해서는 안 된다.

 

이기적인 욕망보다는 성령을 좇는 것

우리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두 방향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다. '정욕'이란 급료가 높은 직장,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망 따위, 다른 사람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마음 등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욕구를 말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위해 살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질 유일한 대안이 된다.

 

가난한 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10:24~25)”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불의와 불평등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셔서 더 이상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이용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도록 하셨다. 도리어 가난한 자의 권리를 옹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동시에 이 말은 가난한 자를 억누르는 자들에게 대항하라는 말과 같다. 우리는 인격적인 토대 위에서 모든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우리를 해치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4:2)”

관계가 깨지고 어려워졌을 때,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하라는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사람을 용서하고 상처 입은 마음이 치유되고 관계가 회복되어 계속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로 결정해야 한다.

사랑과 하나 됨은 결코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여러 번 반복하는 선택의 결과이다. 만약 우리에게 깨어진 관계, 즉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해를 입은 관계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 관계가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신다.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우리 삶의 쓴 뿌리로부터 해방되고, 다른 사람의 결점과 약함에 대해 관대하게 대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에서 흘러나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능력 있게 증거 하게 된다.

 

이상으로 언급한 열 가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거나특별한 임무를주실 때는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우리가 과연 믿을 만한 사람인지 살펴보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또 우리 삶을 위해 정해 놓으신 계획 가운데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지금까지 살펴본 기본적인 것들을 유의해야 한다.

 

 

2. 충성된 자를 부르신다

맡겨진 일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곳에서는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성령의 열매를 통해 나타나는 경건한 성품은 큰일에서도 나타나지만 작은 일 가운데서도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있는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를 원하신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지위를 보장하시고 사역을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들이 즉시 성취된 적은 없다. 어떤 사역이나 지위가 맡겨지기 전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성품을 훈련시키신다.

하나님은 장래에 우리를 쓰시기 위해 지금 우리가 훈련 받기 원하신다. 견고하고 강인하며 한결같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단지 바다를 건너갔다고 해서 유능한 선교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고향에서 할 수 없다면 어디를 가도 할 수 없다.

 

작은 일에 충성된 자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맡기신 작은 일에 충성한다면 앞으로는 더 큰 일을 우리에게 맡기실 것이다. 십일조 생활에서도 지금 당신이 갖고 있는 것부터 증명해 보여라. 그러면 하나님은 더 많은 것으로 당신에게 맡기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맡겨 주신 것에 충성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물질에 충성된 자

예수님은 영적 은사의 참된 부요함을 누리기 전에 물질적인 것에 있어서 충성된 사람인지 우리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고 하신다. 재물에 충성된 사람에게 영적 직무가 맡겨지는 것이다. 재물은돈으로살 수 있는 모든 물질을가리킨다. 우리는 물질적인 소유를 가지고 선한 청지기로 살아야 한다. 제때에 지불해야 할 것을 지불하고 있는지, 또 철저하게 양심적으로 세금을 내고 있는지... 이 모든 삶의 모습이 곧 하나님 나라에서 더 큰 직임과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인지 점검하는 하나님의 시험인 것이다.

 

남의 것에 충성된 자

오늘날 유명한 영적 지도자들도 다른 사람 밑에서부터 일을 하고 그들의 비전이 이루어지도록 섬겼다. 이들은 임무를 완벽하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고 인정을 받아 좀더 큰 권위를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본이다. 남의 포도원을 돌봐 주고다른 사람의 비전과 부르심을 옆에서 섬겨줌으로써 자신을 훈련시킨다면 하나님은 아주 흡족하게 당신의 것을 맡기실 것이다.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르고 권위를 갖게 되더라도 성품의 문제로 도리어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역을 추구하기에 앞서 이와 같은 성품의 문제부터 다루어야 한다.

다윗도 그의 인내와 충성됨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때에 그분의 말씀을 이루실 것이다. 그러나 제일 먼저 오는 것은 연단과 믿음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3. 각자의 성격과 재능을 고려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갖가지 모습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특별한 사명을 맡기실 때에는 우리 각자의 성격과 재능을 세심히 고려하신다. 하나님이 사용하기 원하시는 좀 더 명확한 내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자.

 

정직하게 자신을 평가하라

사람들은 자신을 평가할 때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 한다. 성경은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과 이하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 시작해 본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것이며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보다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를 들으라

하나님이 우리 주위에 두신 사람들은 마치 거울 같다. 충고를 통해 그리고 생각을 나눔으로 우리의 재능과 장점을 알게 해준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모두에게 귀를 기울이라. 자신의 장단점을 보다 확실히 알게 되었다면 자신의 장점이 어느 곳에서 가장 잘 쓰일 수 있는지 하나님께 구하라. 사람들이 우리의 약점을 지적할 때 자신을 낮추고 그 약점을 인정하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확하게 자신을 바라보기 원한다면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과 그들의 생각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 후에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람이 되라

우리는 각자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연 허드슨 테일러는 그의 생각이 급진적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사람들의 말에 개의치 않고 중국내지선교회를 세우고 그 기반을 닦았다. 만약 허드슨 테일러가 다른 사람이 자기에 대해 하는 말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면 그는 고향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하려는 일은 누구도 한 적이 없는 일이라는 두려움과 불신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그에게 바라시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람이 되는 것은 항상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보상은 언제나 크다.

 

자신의 재능과 소원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우리에게 뭔가 하고 싶어하는 소원과 성취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음의 소원을 따라 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밖에서도 우리의 재능을 사용할 수 있지만 먼저 우리의 재능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남을 섬기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특별한 사명은 은사와 재능과 힘을 잘 파악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적절한 섬김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에 소원이 참으로 경건한지 분별해 보라.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나누면서 분별을 청하라. 무엇보다 지속적으로 기도하라.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소원이라면 주님을 위해 사용하라. 먼저 나서지 말고 다만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하라. 섬기는 일에 우리를 드릴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주신 재능과 은사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를 그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4. 특별한 인도하심

우리는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하늘에서 말씀하셨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주 선명하게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에 따라 단순히 살아가야 하는 때도 있다. 우리는 양쪽 다 경험하며 우리의 부르심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우리는 우리가 듣는 음성이 어떤 음성(하나님의 음성, 사탄의 음성, 우리 육신의 음성)인지를 분별하고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할 때 나는 하나님이 친히 인도해 달라고 구하며 주님을 의지하는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주님이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주님의 뜻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이기적인 욕망이나 선입견 등을 내려놓는 기도를 한다. 그리고 사탄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보호해 주시도록 도움을 요청한다.

우리는 불신과 두려움에 휩싸인 채 중대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되며 언제나 매우 신중하게 하나님을 구하며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생각과 소원을 주님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신다. 기도는 대화이므로 하나님께도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한다. 묵상이나 성경공부 중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있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가? 그렇다면 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가?

한 번 기도해서 어떤 느낌을 받았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영적 지도자와 상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고 우리 마음에 주시는 평화와 지정의를 사용하여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우리가 믿음과 겸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그쳐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대개 반드시 해야 하는 결정에 대해 충분히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대하여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리신다. 반면 사탄은 얼른 해치우라고 다그치며 혼란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당분간 기다리는 것이 좋다. 해도 좋은 일이라면 하나님은 분명히 다시 확인시켜 주실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이미 결정을 했음에도 혼란이 생긴다면 다시 확인시켜 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은 자유케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장래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은 마음과 생각이 잠잠한 가운데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들을 신임하시며 그들 마음이 잠잠한 가운데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말씀하실지 그분이 결정하시며 자유롭게 우리를 인도하신다.

한편 하나님은 모호하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말씀하신 것을 깨닫기 위해 몇 주 동안 헤매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씀하신다.

항상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의 방편으로 주변 상황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생각을 통해 말씀하신다.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면 결정전에 그 일에 대해 미리 검토하는 것이 때로는 지혜로운 접근 방법이 된다.

 

양털

기드온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는데, 이를 확인하는 수단으로 양털을 사용하였다. 우리의 삶에서도 상황 속에서 이미 하나님의 뜻으로 드러나는 것이 있다. 양털은 그것을 확인하는 수단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를 구하고자 그 방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데 편한 방법이나 분별법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숙한 지혜를 사용해서 성경적인 원칙에 따라 결정하거나 우리의 마음과 생각 안에서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결정하기를 원하신다.

 

재정 공급

재정 공급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우리가 새 계획을 세웠는데 그것을 충당할 재정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그 계획을 기뻐하지 않으시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재정 공급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인도는 아니다. 그러므로 인도하심을 구할 때 돈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발을 내딛는다면 하나님이 공급해 주신다.

 

성경말씀

하나님은 특별히 우리가 매일 읽는 성경을 통해 우리 상황에 대하여 말씀하실 수 있고 혹은 기도 중에 우리 마음 가운데 특별히 떠오르는 성경 말씀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나 특별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상황을 초월하여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성경 해석의 원칙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평화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평화를 주신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 평화도 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문제로 기도하고 생각할 때에는 아무리 어려운 역경이 있더라도 확신 가운데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평화를 주신다.

 

꿈과 환상

하나님은 꿈과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시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믿는 바에 대한 하나의 확인일 뿐이다. 그것이 새로운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른 확인을 구할 필요가 있다. 꿈과 환상의 세계는 매우 주관적이어서 주의하지 않으면 사탄이 와서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인도를 받을 때 주의할 사항

1. 인생의 청사진을 세우지 마라. 세밀한 계획이나 사업에서 안정감과 방향을 찾지 말고 오직 예수님 안에서 찾도록 하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선도가 아니라 안내자이다.

2. 먼저 현재 알고 있는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라.

3.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보이지 않는 때는 하나님이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 안에서 행하는 사람인지 종종 시험해 보시는 때이다.

4. 하나님께 강요하거나 어떤 시한을 정해서는 안 된다.

5. 의심하지 마라. 영적 암흑시간이 지속될 때 하나님이 과거에 빛 가운데 보여 주신 것을 떠나지 마라.

6. 교만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못 들은 게지."하고 말하지 마라.

7. 의로운 목적을 위해 불의한 방법을 쓰지 마라.

8. ()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을 혼동하지 마라.

9. 시류와 시기를 혼동하지 마라. 하나님의 일과 함께 하나님의 때를 구하라.

10. 지나치게 영적인 사람이 되지 마라. 실제적인 사람이 되도록 하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분의 음성을 다른 경건한 사람들을 통해 확인시켜 주실 것이다.

11. 독립적인 행동을 취하지 마라. 다른 사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라.

12. 영적인 것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람이 되지 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할 때는 지혜롭고 실질적인 대화를 해서 다른 지체들도 나눌 수 있게 하라.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

성경에서는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약속+준비=성취'와 같이 하나님은 약속 후에 우리가 그 약속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면 그 약속을 지킬 준비를 하면서 주님께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때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은 하나님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영적으로 깨어서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곳에 있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는 정확히 해야 할 일과 언제 그것을 해야 할지 정확한 때를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어떤 계획이나 소원을 주시지만 그것을 당장 해야 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생각하고 의논하고 마음 가운데 떠오르는 것을 충분히 분별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원하신다.

 

 

5. 마음을 열고 순종할 때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때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실수할 수 있다. 실수를 인정하는 사람이 자신의 체면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는 사람이다.

지도자가 아무리 잘 알고 신뢰할 만해도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우리가 인도받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결정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으로 혹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확인하는 통로로 지도자를 사용하신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판단력과 직관을 무시하고 어떤 일을 강요하는 일은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므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지정의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지정의를 사용하기 원하신다.

 

인도함을 받는 가장 훌륭한 방법

인도함을 받을 때 우리는 갖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면서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도함을 받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단순한 의사소통이다. 인도함을 받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있다면 하나님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주를 찾으면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열린 마음과 순종을 드리는 것이다.

정지된 것보다 움직이고 있는 것이 방향 바꾸기가 한층 쉽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열심을 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일한다면 우리는 한층 더 쉽게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안정감은 인격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지 계획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여 보라. 그러면서 보다 더 세세한 방향을 하나님께 묻고 들으라. 우리의 최종적인 부르심을 알든 모르든 여행은 첫걸음부터 시작한다. 어떤 부르심이든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그리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유일한 분인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가 여행 중에 어떻게 행동하기 원하시는지는 언제나 명확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인도하시는 신실하심에 대해 신뢰할 수 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29:11)


Posted by 최도사! 청년 성규~♪ Trackback 0 Comment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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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혁’이란 한국 근대성의 욕망과 상흔
                    -드라마 <하얀거탑>에 나타난 감정의 구조

  흰개미는 개미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분류학상으로는 단일한 목으로 분류된다. 약 2억 년 전 바퀴 목에서 갈라져 나와 습성이 개미보다 바퀴벌레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흰개미 역시 다른 개미처럼 철저히 위계화된 사회를 구성하고 산다. 가장 아래 계급은 일개미로 일만 하다 죽는다. 호전적인 병정개미는 일하지 않고 전투만 담당한다. 종족의 번식은  여왕개미가 전담한다. 
 흰개미의 먹이는 죽은 나무‧썩은 흙‧풀‧버섯 등인데, 일개미가 이 먹이를 먹고 토하거나 배설하면 다른 개미들은 토사물과 배설물을 먹는다. 집은 땅 속, 목재 등에 만들지만, 개미탑이라고 하는 지상의 집도 있다. 개미탑은 흙, 모래, 식물 조각 등을 침과 배설물로 버무려 쌓아 올린 것으로 큰 것은 높이 6미터, 지름 3.5미터에 이른다. 미로 같은 통로와 각종 방들로 구성된 이 거탑의 색은 하얗지 않다. 흰개미와 흰개미, 흰개미의 흰개미가 침과 배설물로 땅에 새겨 놓은 생존의 흔적은 과연 무슨 색깔일까?


 1. <하얀거탑>을 우러른 이유
 
 올 1월 6일 시작한  MBC의 20부작 드라마 <하얀거탑>이 3월 11일 막을 내렸다. <주몽>처럼 50%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거나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한 것도 아니지만, <하얀거탑>은 유난히 많은 얘깃거리를 만들어 낸 드라마로 기억된다. 영화나 패션 잡지까지 ‘남의 영역’인 <하얀거탑>을 기사로 다루었고, 인터넷의 게시판은 주인공 장준혁에 대한 글로 가득했다. 가장 많은 사람이 본 드라마는 아니지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 같은 드라마 <하얀거탑>. 특히 평소 드라마를 선호하지 않는 중년 남성과 고학력 식자층으로부터 각별한 주목을 끌었던 <하얀거탑>.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바라보고 말하게 했을까? 

  이런저런 뉴스 매체에서 <하얀거탑>의 인기 비결로 거론한 요소는 높은 완성도, 일상의 권력관계에 대한 리얼한 해부, 장준혁이라는 캐릭터의 매력 등이다. 이 중에서 형식적 차원인 속도감 있는 연출과 배우들의 잘 조율된 연기와 같은 드라마적 완성도를 논외로 한다면, <하얀거탑>의 인기 비결은 일상의 권력관계를 배경으로 한 장준혁이라는 캐릭터에 있다. 연출자인 안판석 PD는 영화잡지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하얀거탑>의 연출 전략을 “장준혁이라는 인물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나머지 인물은 장준혁의 캐릭터를 밝혀 주는 조명’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연출자의 의도대로 <하얀거탑>의 시청자들은 장준혁의 캐릭터에 매료됐고, 장준혁이 담관암에 걸렸을 때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장준혁을 살려 달라’는 글이 쇄도했다. 이런 현상은 적어도 장준혁과 자신을 전면적으로 동일시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장준혁에 대해 공감하는 시청자가 많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장준혁의 그 무엇이 그토록 많은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을까? 시청자들은 어떤 ‘감정구조’를 갖고 있기에 장준혁에게 매료되었을까?

  나의 경우는 이랬다. 장준혁이 외과과장이 되는 과정을 그린 전반부는 장준혁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가 왜 과장이 되기 위해 정략적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납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최고의 실력자이지만 주변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고 있었다. 실력은 있지만 정치적 약자의 자리에 시청자의 감정이입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 실력을 선의로 행사한다는 신뢰가 전제돼야 하다. 장준혁은 그런 신뢰를 주었다. 나는 그가 과장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궁극적 지향이 ‘자리 욕심’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홀어머니에게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했고, 자신의 실력을 질시하는 주변의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안전한 자리가 필요했을 뿐이다. 아마도 그 자리에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 희망이었을 것이다. 전반부에서 내가 장준혁을 보는 감정은 연대와 응원이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나의 이런 감정은 의심과 회의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조그만 자신의 잘못도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과 한마디로 막을 일을 소송까지 가게 만든다. 소송을 하면서도 갖가지 무리수를 둔다. 그 소송에서 패소한다 해도 과장 자리를 잃는 것도 아닌데 승소에 과도한 집착을 보인다. 이 대목에서 나는 그가 체질적으로 지기 싫어하는 권력 지향적 인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의술이 목적이고 과장 자리가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하고. 그러나 장준혁이 암에 걸린 이후 보여 준 행동은 다시 이런 의혹마저 그를 설명하기에는 단조롭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는 시신 기증과 상고이유서를 동시에 남겨 놓는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위해 헌신했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장준혁을 선악으로 판단하고, 호오로 구별 짓기가 쉽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매우 예민하고 강하고 복잡한 캐릭터로 구성된다. 그 이유는 그가 병원 안팎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껴안고 오로지 자신의 판단과 행동으로 해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아들, 장인의 사위, 아내의 남편, 후배의 선배, 애인의 정부, 친구의 친구……, 그는 그 어느 역할도 버리지 않고 껴안았다. 그건 그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문제들을 풀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현재적 인간이며 특수성의 인간이다. 그에게 멀리 있는 관념적 보편성은 관심 밖이었다. 그래서 장준혁이란 존재는 아주 오래된 철학적 질문을 환기시킨다. “정당한 목적을 위해 부정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질문은 한국 근대성, 특히 박정희 군부정권 하의 압축적 경제성장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철학적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산업화 vs 민주화’의 대립은 현재의 보수-진보 이념구도를 결정하는 기저를 이루고 있다. 산업화 담론이 ‘경제’와 ‘성장’을 특권화하면서 정치적 독재의 해악을 평가절하한다면, 민주화 담론은 ‘정치민주화’와 ‘분배’를 강조하면서 독재의 해악을 부각시킨다. 장준혁은 강자의 논리만이 관철되던 산업화 시대에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인물이다. 그래서 인간화된 삶을 위해서는 사회적 성공이 절대적 조건이라는 조숙한 현실 인식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목적을 절대화함으로써 부정한 수단을 정당화하는 산업화 담론의 적자처럼 보인다. 유신 이전의 박정희 같기도 하고, 압축 성장의 시대를 관통한 무수한 보통사람의 표본 같기도 하다. 즉, 압축 성장의 산업화 시대에 형성된 삶의 조건을 체화하면서 그에 맞는 내면을 갖게 된 무수한 보통사람의 전형성을 매혹적으로 표상한 것 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시청자들이 <하얀거탑>과 장준혁에 매료되는 것이 우리 안의 ‘산업화 정서’를 지금 현재 너무나 익숙한 일상의 권력관계로 불러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바로 내가 겪었거나 겪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 주기 때문에 시선을 모으고, 내 안에 있었거나 있는 꿈과 상처를 보여 주기 때문에 마음을 움직인 게 아닐까? 이 글은 이런 가정 하에 <하얀거탑>의 장준혁을 한국 근대성의 상징적 인물로, 여기에 공명한 시청자들의 감정구조를 한국 근대성의 보편적 욕망 혹은 상처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근대적 상징 공간으로서의 <하얀거탑>
 
  <하얀거탑>이란 표현을 지시적 의미로 받아들이면 명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건물을 의미한다. 약간의 비유를 허용하면 그 건물 내에 있는 의사들의 위계화된 조직까지를 포함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어쨌거나 의사들의 세계를 지시한다. 하지만 더 나아가 완전한 은유로 수용하면 <하얀거탑>은 일상의 권력관계를 뼈대로 세워진 이 세상의 모든 조직 혹은 집단을 지시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드라마는 병원을 무대로 하지만 성격은 정치 드라마에 더 가깝기 때문에 <하얀거탑>의 의미를 은유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하얀거탑>이 하나의 상징이라면, 그 의미는 <하얀거탑>이 지시하는 ‘명인대학병원’이란 기표를 통해 해석해 볼 수 있다. ‘대학병원’은 대학이자 병원이다. ‘대학’(학교)과 ‘병원’(혹은 정신병원)은 감옥(혹은 사법 체제)과 더불어 근대 지식권력을 작동하게 하는 기저의 사회구조이다. 학교는 훈육을 통해 온순한 육체를 길러 내고, 여기에 지식을 주입함으로써 상호 의존성이 높은 근대적 분업노동에서 협력이 가능한 노동력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병원(정신병원)은 고장 난 육체와 정신의 재생산을 담당하면서 온전한 1인분의 노동력에 대한 검증 역할을 담당한다. 감옥은 근대적 규율에서 이탈된 위험한 육체를 격리, 교정시키는 공간이다. 푸코의 근대 권력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에서 학교와 병원과 감옥은 근대를 지탱하는 기초적인 구조물이다. 이 구조물은 근대를 지탱하는 신화인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논리가 스며 있는 자연을 극복할 수 있다’라는 인간중심주의 혹은 이성중심주의의 산물이다. 거칠게 도식화하면, 서구에서 중세의 신학적 세계관에서 진리의 위치를 독점했던 ‘신의 말씀’은 근대로 접어들면서 과학, 예술, 종교의 삼두마차로 분화했다. 신이 독점하던 권리를 진리 탐구는 과학이, 인간 감정과 미는 예술이, 죽음의 문제는 종교가 담당하게 됐다. 하지만 정치적 삼권분립이 행정부의 권리가 특권화됐듯, 근대적 이념의 삼권분립도 사실은 인간 이성이 주도하는 과학의 권리가 특권화된 것이다. 학교와 병원과 감옥은 특권화된 과학의 권리가 작동하는 장소이다. 학교는 진리의 이름으로 공식적 지식을 생산하고, 병원은 정상 비정성상을 구분하는 결정권을 행사하며, 법원은 정의의 이름으로 사형 선고까지 내릴 수 있다. 의사‧판사‧교수 등의 전문직이 어느 자본주의 사회에서건 선호하는 직종으로 각광받는 것도 근대를 지탱하는 기저에 뿌리박고 있는 안정적인 지식권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근대 사회의 권력구조를 기저에서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들 조직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일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의도된 계산인지 <하얀거탑>은 전반부는 과장 선출을 둘러싸고 주로 대학병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며, 장준혁이 소송에 휘말리는 후반부는 법원과 병원을 오간다. 말하자면 근대 지식권력을 지탱하는 구조물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성격을 규정하기가 극히 모호하다. 전반부는 외견상 의학 드라마이다. 의학 드라마가 장르로 정착한 것은 생사가 엇갈리는 병원이라는 공간에 극적 소재들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상의 의학 드라마는 의학권력에 휴머니즘의 낭만적 가치를 덧씌워 기존의 의학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얀거탑>은 거꾸로 나아간다. 병원 내의 권력관계의 재생산 과정에서 의학적 행위의 성격이 결정되는 정치적 맥락을 부각시킨다. 장준혁이 소송에 휘말리는 후반부는 법정 드라마의 성격이 가미된다. 법정 드라마가 장르로 정착한 것 역시 압축된 서사를 쉽게 얻을 수 있으면서 지배적인 사회질서를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적 유용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법정 드라마는 소송이란 재미있는 싸움을 지켜보면서 쾌락을 얻는 비용으로 법=정의라는 전제를 새삼 인정하게 만든다. <하얀거탑>에 나타나는 법정은 휴머니즘이나 정의와는 무관한 극히 사무적인 장소로 그려진다. 그리고 소송을 둘러싼 변호사들의 활동은 지극히 전략적이다.

  요약하면, <하얀거탑>은 근대적 권력을 지탱하는 병원과 법원을 드라마로 끌어들이면서 기존의 장르 드라마와 사뭇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그 방식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해부학적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해부학은 피부 아래로 깊이 더 깊이 새로운 광경을 봄으로써 의미 있는 사실을 발굴해 낸다. <하얀거탑>은 인술과 정의로 장식된 병원과 법정이라는 공간의 이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그 드러냄은 기존의 의학 드라마와 법정 드라마에 가려져 왔던 풍경들이다. 이 풍경은 낯선 드라마 속의 풍경이면서 너무나 익숙한 현실의 풍경이다. 시청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우리 병원과 똑같네”, “바로 우리 회사의 사내 정치를 보는 듯하네”라고. 현실에서 너무 익숙하지만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상황을 드라마 속에서 거듭거듭 보여 주는 것은 그 자체로 재현의 정치적 효과를 갖는다. 익숙하게 젖어 있는 것이 드라마 속에서 나타날 때 얼마나 낯설게 느껴지는지 시청자들이 자각한다는 것은 익숙했던 기존 드라마 속의 풍경이 사실상 허구임을 깨닫게 해 준다. 말하자면, 기존의 의학 드라마와 법정 드라마의 휴머니즘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토대의 권력관계를 비춰 줌으로써 근대 지식권력을 탈신비화시키는 것이다. 

  <하얀거탑>은 분명 지식권력의 미시물리학을 밑그림으로 깔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보여 주는 지식권력의 양태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지식권력은 전문직 규범에 의해서 신분이 아닌 하나의 역할로 작동하는 것을 이상으로 가정한다. 하지만 <하얀거탑>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모습은 전문직 규범이라는 매개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 갖은 반칙과 위반에 의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적나라한 양상으로 벌어진다. 권력의 작동원칙에 대한 사회문화적 합의가 약한 사회에서는 일상의 권력투쟁의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제도가 보증하는 합의 체계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경쟁관계가 개인의 부담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압축적 성장의 지상목표를 위해 민주화를 희생시킨 한국 근대화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정치적 민주화는 이룩됐지만 일상의 비민주성은 여전히 압축적 근대화의 상흔으로 남아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이다. 이런 점에서 <하얀거탑>은 한국 근대성의 특수한 세계라는 은유적 공간 위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자신의 얘기처럼 느끼는 것도 평소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누구나 체험하고 있는 일상의 권력관계를 그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바로 이 ‘즉물적 사실성’ 텔레비전 드라마의 즐거움에 대한 논의에서 사실성은 크게 세 차원으로 나뉜다. 물리적 사실성은 텔레비전에 나타나는 사물들이 사진처럼 실재의 모습 그대로 재현돼 있는 것을 말한다. 사회 경제적 사실성은 드라마가 그리는 사회적‧경제적 현실이 실재 현실과 유사하다는 의미에서의 사실성으로 서사적 사실성이다. 감정적 사실성은 이안 앵이 드라마 <달라스> 시청자들의 분석을 통해 개념화한 것으로 자신이 처한 사회적‧경제적 조건과 다른 환경에 있는 인물일지라도 시청자들이 동일시를 느끼는 일정한 감정적 보편정서가 있고, 그런 보편정서에 충실할 경우 얻게 되는 사실성이다. 여기서 ‘즉물적 사실성’은 앞의 두 차원의 사실성을 포괄한 개념이다. 이 개념을 사용한 것은 굳이 이 글의 맥락에서는 두 차원을 구별할 필요가 없고, 장준혁에 강한 동일시를 일으킨 이 드라마의 ‘감정적 사실성’과 개념적 차이를 단순하고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익숙함과 낯섦을 동시에 불러오면서 시청자들이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한 계기가 아니었을까. 이 바탕 위에 마치 자신의 삶과 심리를 대변해 주는 듯한 장준혁이란 캐릭터가 배치됨으로써 시청자들이 느끼는 ‘감정적 사실성’이 확보되면서 이 드라마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청자들이 장준혁이란 캐릭터에 그토록 강한 동일시를 느끼는 이유, 즉 이 드라마의 ‘감정적 사실주의’에 공감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3. 한국 근대성의 욕망 혹은 상흔
 
  <하얀거탑>에서 가장 많은 시청자들이 가장 강한 동일시를 느낀 인물은 단연 장준혁이다. 장준혁은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악역에 해당한다. 반면 최도영은 기존의 의학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설정될 법한 선한 배역이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은 최도영에게 동일시를 느끼지 못한다. 네티즌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도무지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최도영은 시청자에게 ‘감정적 사실성’을 주지 못한다. 반면 장준혁은 “옳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반응이 절대적으로 많다. 여기에 대해 연출자 안판석은 “시청자는 장준혁이란 타자를 보고 있는데, 어느덧 거울을 보듯 그 안에서 자기를 보게 되기 때문”이라고 시청자와 장준혁의 동질성을 요인으로 꼽는다. 나는 여기에 동의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시청자들이 장준혁에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를 그가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어떤 보편적 감정의 구조를 호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장준혁이란 인물을 한국 근대성의 욕망과 상흔이 각인된 상징적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장준혁이란 욕망 혹은 운명

  장준혁은 외과의다. 대학병원에서 외과의는 최전방에 서 있다. 모든 의학적 지식이 종합돼서 마지막에 수술이라는 행위로 나타날 때 그걸 집행하는 사람이다. 육체에 스며 있는 자연 혹은 신의 논리를 이성의 힘으로 장악하고자 하는 대학병원이 근대적 상징 공간이라면 외과의는 근대적 기획의 최첨병이다. 외과의는 생명의 유기적 질서를 산술적 확률의 세계로 돌려놓는다. 외과의의 계산에 따르면, 폐와 신장은 한쪽을 잘라내도 되고, 간은 4분의 3을 잘라도 된다. 맹장 따위는 애초부터 별 쓸모없는 것이니 잘라 버려도 관계없다. 외과의는 생명에 지장이 없는 한 최대한 인체를 잘라 낸다. 그럼으로써 생명을 살린다. 그는 생명의 유기적 질서에 필요한 최소한의 구성요소를 조각하면서 신의 섭리와 경쟁 혹은 타협한다. 파괴적 창조라는 근대성의 진화 방식을 신의 대리인의 위치에서 가장 첨예하게 실행하는 외과의.
  장준혁은 외과의 중에서도 공격적인 수술을 선호한다. 수술이 환자를 살려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수술을 통해 환자를 살려내는 것만 계산할 뿐 수술을 하다 사망하는 경우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가 경제정책자라면 그는 철저한 성장주의자이다. 그는 또 수술의 템포가 매우 빠르다. 회진의 속도도 빠르다. 철저히 데이터에 의존한 사무적인 진료 태도를 취한다. 환자를 위로하는 ‘불필요한’ 말은 웬만해선 하지 않는다. 이렇게 확보한 시간은 더 많은 수술에 투입된다. 경제행위에 비유하면, 그는 오로지 성장을 위해 나머지를 희생시키는 압축적 성장을 지향한다. 그 결과 그는 주변사람과 갈등을 겪지만 수술 실력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일인자가 된다.

  이렇게 보면 그는 편집증적일 정도로 모범적인 외과의다. 하지만 이런 그가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는 곳이 있으니, ‘병원 내 정치’이다. 그는 은사인 이주완의 견제와 핍박을 무릅쓰고 스스로 외과과장이 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친구 최도영은 “넌 이미 누구나 인정하는 훌륭한 외과의야. 그런 네가 왜 감투에 연연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한다. 장준혁은 이런 말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건 그가 외과과장이라는 자리, 감투 자체를 탐내서 정치적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자신이 과장이 돼서 가장 많은 수술을 할 수 있을 때 병원이나 환자는 가장 큰 혜택을 볼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의 이 오만하지만 정확한 현실 판단은 외과과장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신의 정치적 행동들을 대의를 위한 ‘도구적’ 행동으로 정당화해 준다. 때문에 그는 온갖 정략적 수단을 동원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거나 망설이지 않는 결의에 찬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준혁의 오만하기까지 한 확신에 찬 태도가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로만 볼 수 있을까? 그렇게 인정하고 넘어가기에는 그의 태도는 과도하다. 자신을 신으로 상상하는 ‘가드 콤플렉스(god complex)’라 할 만한 정도이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조그만 이의제기에도 히스테리를 보인다. 이런 태도는 방어적 공격성으로, 심리적 결여의 산물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결핍을 느끼게 하였을까? 그의 사회적 존재를 들여다보자.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수재이다. 그리고 돈 많은 개업의의 철없는 딸과 결혼했다. 아마도 정략적이었을 것이다. 홀어머니는 시골집에서 혼자 지낸다. 아내와 어머니는 별 교류도 없다. 장인은 그의 재능을 부러워하며 그가 못 이룬 대학병원 과장의 명예를 사위가 누리길 희망하며 마치 아들처럼 그를 보살핀다. 사실 장준혁은 아내보다 장인과 더 가깝다. 아내와의 사이에 아이도 없다. 한마디로, 장준혁은 고향에 어머니를 홀로 두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장인의 집에 입양되어 간 입양아와 같은 존재이다. 그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는 현재의 장인을 능가하는 어떤 자리에 가야 한다. 그 자리에 가는 것만이 그에게는 의사로서 사회적 역할을 다하는 것임과 동시에 어머니를 위한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길이다. 그는 다른 길이 없다. 그래서 매우 조급하게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를 치르고, 사람들을 전투를 위한 우군으로 조직하고자 한다. 그는 이 동맹 과정에서 자신의 유일한 무기가 실력뿐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실재로 장준혁의 주변인물은 어머니와 최도영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그의 실력 때문에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최도영처럼 형제들이 줄줄이 의사인 집안도 아니고, 스승 이주완처럼 3대가 의사인 집안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늘 실력에 대한 인정에 목말라하고 쌓아 놓은 실력의 성이 무너질까 거세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애인 희재가 ‘오진’이라는 말을 꺼내기만 해도 술잔을 날려 버리고, 자신의 조그만 잘못을 인정 못 해 소송 사태를 불러오고, 마지막 순간에 시신 기증 내용을 담은 유서와 함께 상고 이유서를 남겨 놓는다. 거세 콤플렉스가 오죽 심했으면 이런 행동들이 나왔을까. 그러니 그에게 실력에 대한 과도한 확신과 오만한 태도는 계급성의 발로이자 일종의 운명인 셈이다. 즉, 중간계급의 아비투스가 지배적인 공간에서 그들과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하층계급 장준혁의 입장에서는 ‘인술’이라는 적들의 헤게모니 담론의 허구를 폭로하기 위한 ‘실력’의 강조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장준혁의 ‘실력에 대한 오만함’이 인격적 결함 이전에 계급성의 산물이란 사실은 이주완과의 갈등관계에 잘 나타난다. 이주완은 3대가 의사인 집안 출신이다. 별명이 ‘영국 신사’로 어떤 경우든 직설적으로 속을 보이지 않고 완곡어법을 구사하는데, 늘 자신의 인격을 관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장준혁에 대해서는 실력은 있지만 의술을 베풀기에는 인격이 안 되는 인간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늘 ‘인술’을 강조하지만, 장준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장준혁의 눈에는 자신을 경쟁자로 의식하고 견제하기 위한 수작이자 실력 없음을 가리는 메타포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장준혁에게 이주완은 자리가 주는 권력과 거기에 부가되는 명예를 동시에 추구하는 소심하고 욕심 많은 인간, 즉 흔하디흔한 위선적인 전문직 권력에 불과했을 것이다. 실력 있고 정당한 전문직 권력이 되고 싶은 장준혁에게 이주완은 악은 아니지만 철저한 적이 될 수밖에 없다(반면 한국 정치사에서 김종필이 했던 역할을 연상시키는 캐릭터인 우용길은 의사로서의 위선조차 없이 노골적으로 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악에 가깝지만 동맹이 가능하다. 장준혁이 동맹하는 인간들은 장준혁의 ‘부당한 방법’을 규범의 이름으로 비판하지 않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전문직 규범에서 완전히 이탈한 정치적 인간들이다. 장준혁이 이들과 동맹이 가능한 것은 같은 자리를 경합하는 정적이 아닌데다, 이들을 철저히 도구적으로 이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주완은 장준혁이 갖고 싶어하는 과장 자리, 최고 외과의의 명성, 의술에 대한 철학까지 철저히 경합하는 반대파이다). 그래서 장준혁은 이주완 앞에서 가장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러한 태도는 그에게는 ‘위선의 인술’에 ‘적나라한 실력’으로 맞서는 일종의 정치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준혁의 이러한 태도는 그 누구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한다. 친구 최도영까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역시 형제가 줄줄이 의사인 집안 출신으로 장준혁의 정치적 위치에 대한 공감이 없기 때문이다. 권력욕이 없고 위선적 잔머리를 굴리지 않을 뿐 최도영의 아비투스는 차라리 이주완에 가깝다. 그 역시 의술은 실력 이전에 인술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환자를 염려하는 ‘인술’이 더러는 의사 집단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정치적 메타포라는 생각을 그는 계급적으로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층계급인 장준혁의 입장은 기득권의 헤게모니 담론인 ‘인술’의 모호함을 걷어내고, ‘적나라한 실력’을 부각할 때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그래서 장준혁은 의술의 꽃인 외과과장 자리를 욕망하면서 직설법이란 하층계급의 아비투스를 가진 대가로 “실력은 있지만 인간인 덜 된 위험한 놈”으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장준혁은 신기하게도 “인간이 덜 됐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박도 하소연도 하지 않는다. 그냥 무시한다. 이런 태도는 자신이 왜 그런 소리를 듣는지 다 알고 있고, 자신은 그런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으며, 반박하고 하소연해 봤자 통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장준혁은 자신의 계급적 처지를 운명으로 수용한 ‘계급적 운명애’의 인간이다. 장준혁이란 캐릭터가 매력적인 이유, 악역인 듯하면서도 자꾸만 응원하게 만드는 일차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계급적 위치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 이주완과의 갈등은 거기서 온다. 만약 장준혁이 외과과장이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주완의 말에 승복하고 그와 같은 가치관을 내면화하는 쪽이 한결 쉬운 전략일 것이다. 이런 방식은 장준혁에게는 일종의 전향을 의미한다. 즉, 대대로 의사 집안인 이주완의 가치 체계에 순응한다는 것은 지배계급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승복한다는 의미이다. 장준혁은 이 ‘위선의 미학’을 거의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이 점은 장준혁과 동일한 정치적 처지-가진 것 없이 높은 자리에 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상황-를 상상하는 사람들로부터 광범위한 공감을 끌어내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왜 아니겠는가?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고수하는 태도에서는 인간미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략적 태도에서는 지혜와 용기를 보여 주는 이 인간이야 말로 초인에 다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계급적 운명애’의 인간은 스스로 초인의 이미지를 상상하게 되는 운명 속에서 행위의 부정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숭고의 나르시시즘으로 치닫기 쉽다. 숭고의 나르시시즘 속에서 부정한 방법론은 종종 자신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지표로 둔갑한다. 그래서 공격받을수록, 위태로울수록, 고독해질수록, 더욱더 부정적 방법론 속으로 매몰된다. “다시는 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라고 했던 박정희는 쿠데타라는 부정행위를 역사 발전을 위한 자기희생으로 정당화했다. 적어도 이 나르시시즘 속에서 당사자는 자신을 대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부족장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적(특수한 현실=박정희의 경우 지독한 가난)과 싸우기 위해 불가피했던 부정적 방법론이 자신의 부족에 대한 사랑으로 해석되기를 욕망한다. 장준혁의 경우도 마주한 적(홀어머니 밑의 가난)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외과과장이 되기 위해 할 수밖에 없었던 부정적 행위가 부족(자신과 동일한 계급적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어머니와 애인 희재밖에 없다)을 위한 것임을 이해받고자 욕망했다. 그래서 그는 적들에게는 사회적 인정을 갈구했지만, 이해받고자 하진 않았다. 하지만 ‘준혁아’라고 불러 주는 3명의 부족(어머니, 애인 희재, 최도영)에게는 자신의 선의를 이해받고자 했다. 최도영의 경우는 실력에 대한 인정과 선의에 대한 이해 양자를 모두 바란 듯하다. 그런 점에서 최도영은 적이자 부족이다.

  장준혁의 욕망의 본질은 최도영과의 관계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최도영에게 반복해서 “자기 실력을 인정하느냐”고 묻는다. 다른 사람에게는 묻지 않는다. 자신이 스스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도영에게 되풀이해서 묻는 것은 실력에 대한 인정보다 선의에 대한 이해를 더 갈구했기 때문이 아닐까? 즉, ‘적이자 부족’인 최도영에게 ‘적의 사회적 인정’과 ‘부족의 이해’를 동시에 욕망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장준혁의 욕망은 충족될 수 없는 모순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자기 기만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장준혁의 비극성이 있다. 그의 욕망은 애초에 이해받기 어려웠기 때문에 사회적 인정의 고지로 끝없이 전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궤도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의 눈앞에 설정해 놓은 지금 당장의 목표는 다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끌어당기는 ‘최후의 허구적 목표(final fictional goal)’일 뿐이다. 오히려 그에게는 적들의 인정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처음부터 그의 운명은 가 닿을 수 없는 고지를 향해 가면서 스스로를 소모시키면서 죽음을 맞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고 봐야 한다. 더 많은 병을 고치는 자리에 가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가장 자신이 잘 알고 많이 고쳤던 병에 걸려 죽는 이 아이러니! 욕망의 불 속에서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차지했다는 그 사실로 인해 스스로의 눈을 찔러야 하는 오이디푸스의 비극과 얼마나 닮아 있는가? 그런데 왜 이런 비극적 인물에 우리는 열광하는 것일까?
 

 *장준혁이란 매혹 혹은 상흔


 

  지금까지 남성들에 인기가 높았던 드라마는 <야인시대>‧<무인시대> 같은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 활극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교육받지 못한 ‘주먹’들로 몸뚱어리 하나로 시대와 싸우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인물들이다. 이런 유형의 인물에 남성들이 매료되는 것은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꽉 짜여진 현대 분업사회의 일상 속에서 소시민적 생활을 해야 하는 남성들에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저질러 대는 갱들의 세계에 한 번쯤 감정이입하는 것은 청량음료를 마시는 정도의 즐거움은 늘 있는 것이다. 갱스터 무비가 장르화된 것도 분업사회의 소시민적 일상에 결여된 남성적 판타지를 공급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야인시대>는 이런 갱스터 무비의 장르 틀에 김두한을 갱이 아닌 지사로 약간 비틀어 놓았다. 말하자면 감정이입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없애 보수적인 매체인 TV가 납득할 만한 인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두한이란 인물은 시청자에게는 드라마라는 판타지 속에서만 감정적으로 동일시가 되는 인물이다. 일부 조폭 지망생을 제외하면 김두한과 현실의 자신을 동일시하는 시청자가 도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장준혁은 시청자들이 현실의 자신과 동일시하기에 안성맞춤인 캐릭터이다. 그는 협객이나 조폭이 아니며, 세계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며 세계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며, 마지막에는 좌절한다. 김두한이 대부분의 남성 시청자들에게 한 번쯤 저질러 봤으면 하는 남성 판타지를 제공한다면, 장준혁은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면서 그 안에서 자기 연민을 끌어낸다. 즉, 대부분의 엘리트 샐러리맨이 모범생으로 상상했던 젊은 시절의 자아 이미지와 사뭇 다른 조직에 매몰되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실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누구나 느끼면서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던, 모두가 얘기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공통의 경험을 장준혁은 다만 보여 준다. 그건 시청자들에게 자신이 계몽하는 스승은 되지 못해도 함께 얘기하고 놀아 주는 친구가 돼 줄 수 있음을 먼저 보여 준다는 의미이다. 그는 우리의 이상형이 아니라 친근한 현재형으로 다가온다. 아주 익숙한 무언가를 호명한다.      

  한국 근대사에 ‘친근한 현재형’을 유난히 강조한 인물이 있었다. 장준혁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이 박정희였다. 외과과장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은 경제성장 정책을 밀어붙이던 박정희의 모습과 흡사하다. 현실 인식은 정확했을지 모르지만 실천의 방법은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란 과도한 숭고의 나르시시즘 속에 빠져 있었다. 그 안에서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을 욕망하는 모습도 닮았다. 몰락의 이유와 과정도 닮은꼴이다. 장준혁은 외과과장이 되자마자 부원장이 건네주는 의약품 납품 리스트를 받는다. 과장 선거에서 그를 지원한 사람들이 대가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의료사고 소송이 그를 압박한다. 그는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정치적 빚’을 진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지만 그는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개의 문제를 만드는 폐쇄회로 속을 맴돈다. 정치적 빚을 갚기 위해 새로운 빚을 지는 ‘돌려막기’의 과정에서 그는 애초의 선의를 모두 잃어버린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고치는 병에 걸려 사망한다. 자기 스스로는 그 병을 고치지 못한다.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고속으로 추진하기 위한 정치적 독재에 발목이 잡힌다. 저항이 강하면 그만큼 독재의 강도를 높였다. 그 역시 ‘돌려막기’를 하다 유신이라는 막다른 길에 접어들어서 결국은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부하의 총에 맞아 죽는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목적을 위해 동원했던 부당한 수단 때문에 파국을 맞는다는 점이다. 차이는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챔피언의 자리에서 방어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면 장준혁은 가난한 집안의 자손으로 권력을 갖기 위해 도전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 장준혁은 사실 박정희의 모습에 성공을 추구하는 약자의 모습을 덧씌워 미화시켜 놓은 캐릭터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장준혁은 박정희 이미지에 환호하면서도 독재자란 낙인 때문에 감정이입을 방해받는 한국 사회의 집단적 감정구조를 안전하게 자극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감정구조를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징후는 강함에 대한 열광이다. 장준혁이 외과과장 자리를 향해 질주할 때 시청자들은 그의 부도덕함에 아랑곳 않고 확신과 정확한 계산, 지칠 줄 모르는 욕망에 매료됐다. 물론 이러한 동일시는 장준혁이 없는 집 자손이기 때문에 느끼는 집단적 연대감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이 감정구조의 또 다른 징후는 약하고 억압받는 것에 대한 연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연민은 연대로 나아가는 계급적 동질성의 확인이 아니라 자기 안의 타자에 대한 자기애적인 것이다. 과거의 자기 모습 혹은 현재도 여전히 내면화된 자기 자신이면서 드러내기 싫고 인정하기 싫어서 스스로 타자화시켜 놓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인 것이다. 그래서 이 연민은 타인에 대한 염려와 애정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 안의 죄의식의 투사에 불과한 것이다. 장준혁이 몰락할 때 시청자가 갖는 공감은 연민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장준혁의 강함을 구성했던 부당한 행위를 본인들도 현실에서 체험하며 살았기 때문에, 강함을 맹목적으로 열망했기 때문에 얻게 된 죄의식을 스스로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장준혁의 몰락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감정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사실 강함에 대한 맹목적 열광과 자기애적 연민은 동전의 양면이다. 강함에 대한 열광이 불러온 부당한 방법에 대한 죄의식이 누적되면서 자기 연민은 강화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이 남긴 상흔은 집단적 감정구조를 이 폐쇄회로 속에 가두어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연민하지만 연대하지 못하고 여전히 강함에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것은 오랫동안 독재와 관계 맺은 마음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하얀거탑>에 대한 중년 남성들의 열광과 네티즌들의 이런 저런 댓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우리는 성장 지상주의 패러다임 속에서 아득히 멀리 분배를 꿈꾸고, 부단한 노동 속에서 휴식을 꿈꾸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진정한 소통이 있는 평화를 기원하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래서 대규모의 운하를 파겠다는 이명박의 추진력이 인기를 끄는 것도 잠시 주춤했던 성장불패의 신화가 또다시 재연되고 있는 조짐처럼 보인다. <하얀거탑>이 훌륭한 드라마인 이유는 종영하면서 살려 달라는 철없는 네티즌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장준혁을 사망 처리해서, 전작의 인기에 편승해 찌질한 속편을 만들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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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B C 스 페 셜 - 김명민은 거기 없었다..090412.HDTV.XviD-Ental.avi



이전에 그의 작품을 봐왔지만, 사실 그는 배우로의 존재감보다는 캐릭터로서의 큰 존재감을 갖는 배우였다. 그러다보니 단 한번도 김명민의 일상이 떠올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MBC스페셜 '김명민은 거기 없었다' 속 김명민의 모습은 더욱 생경했다.
배우 김명민조차 낯선데, 스타 김명민은 더욱 그렇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장분위기를 위해 다정히 스태프들의 이름을 부르고 안부를 물으며 엷은 미소를 짓는 김명민을 바라보는 것은 조금은 불편할 정도로 완벽한 느낌이었다. 저런 스타는 물론, 저런 배우를 본 적이 없어서 이기도 하고,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자연스레 몸에 밴 자기강박증같은 건 아닐건가 하는 다소 비뚤어진 시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기 때문일게다.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공치사 혹은 자랑처럼 보일 수도 있을 자신의 과거들, 자신의 공채 탤런트 시절, 그러니까 3년간의 회사 출근과 PD들에게 눈도장을 찍던 순수한 자신의 열정을 가감없이 말할 수 있는 순수함을 가진 배우이기에...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순간, 제대로된 끼니조차 떼우고 있지 못한 주제에 냉장고 속 가득한 오미자물을 촬영중인 PD에게 건내는 낯간지러움...

사실 자신의 입으로 그런 말을 하고, 카메라를 의식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는 걸 보면서 오히려 저런 솔직함이 연기와 촬영장에서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것이 '배우' 김명민에 대한 진실이든, MBC스페셜 속 '배우' 김명민은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어제 '김명민은 거기 없었다'를 보면서 사실, 그의 무명시절의 설움이나 체중감량과 같은 모습이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수많은 배우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배우들도 많으니까. 추격자의 김윤식도 그랬고, 변희봉 선생같은 분은 주연보다는 맛깔나는 조연으로 브라운관을 누비다 이젠 한국영화 돌풍의 주역이 되셨다. 배우 임창정의 경우도 오랜 무명시간을 거쳤고, 조재현도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안방극장에서 동분서주하며, 기대주의 꼬리표를 오래 달고 있기는 했지만 김명민의 무명시절이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엇이 그렇게 김명민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건 김명민이 스스로의 아우라를 갖고 있지 않은 배우이기 때문일것같다.

'김명민은 거기 없었다' 내용 중 이런 말이 나온다. 
'장준혁, 강마에 신드롬은 있었지만, 김명민 신드롬은 없었다'

그리고 또 김명민은 이렇게도 말한다.
"제 이름이 아니라 캐릭터만 쭉 올라오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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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까지는 퍼온 글과 사진이였다.
기억하고 싶은 장면들과 내용들이 잘 포착되어서 그냥 편리하게 퍼왔다^^;;

영상을 보면서 소름끼칠 정도의, 인간이길 포기했나?!!
이 정도로 연기에 대한 열정이 있는 김명민!!!
스스로 캐릭터를 만들어가며, 없는 것에 더 연구하고 노력하여 살을 붙이는 모습들-
(하얀거탑 마지막 장면에 신문을 잡을 때, 한쪽손은 잡은 것처럼만 보여주는 치밀함)

그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을 본 받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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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주소서

2009. 8. 7. 03:58 : Diary
청년부 수련회 마지막날.
뒷정리하면서 장비를 나르다가 허리를 삐긋했다.
단순히 장비를 잘못 들었다기 보다는, 그 동안 달려와서 육체도 쉼이 필요했던 것일까?

기말고사에 대한 스트레스와 밀려있는 레포트의 압박이 끝나기 무섭게
시작한 글로벌 지도자 축제를 시작으로, 예비군 훈련(이때는 너무 놀았다-_-;;)
일반인, 중고등부1차, 어린이, 중고등부2차까지 계속 쉼없이 달려왔다.

삶의 여유, 마음의 쉼 없이 계속 달려왔던 7월.
그래서 그런걸까? 수련회 마지막날, 다 끝났다고 마음이 많이 들떠있었다.
끝날때일수록 긴정하고 있어야 하는데, 물놀이 이후 확 풀려서 그런지 다쳤다. T-T

다시 한번 느끼지만-
사역에 대한 비전이 있고, 마음이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다시 되새기면서, 운동의 필요성과 더불어 줄넘기과 뚝방걷기를 실천목표로 삼았다.
이번엔 반드시!!! 작심삼일로 끝나지 않으리라

몸의 약함으로, 한주간 쉼을 보내면서
주님이 보여 주셨던 내 마음은 "불경건함 - 하나님 없이 사는 죄" 였다.
사역하면서 찾아오는 보상심리를, 8월에 와장창 보내리라 다짐했는데, 그 안에는 하나님이 거하실 곳이 없는, 하나님과 동행함이 없는 그냥 내가 좋아하고 즐기고 싶은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멋대로 결정하며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마음은, 육체의 정욕으로 찾아오는 죄에 대해서만 집중하느라
삶 속에 자리잡은 다른 죄들을 보지못한 것에 대해 보여주셨다.
또한 몸이 힘들다보니, 짜증도 막 일어나고, 생각으로 찾아오는 죄를 싸우기보다는 낳두고
찾아오는 게으름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주였다.

그러다, 지금에서야 정신을 차린! 나~

다시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것을 다짐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씩 끊어내고, 내 삶에 새로이 부어주시는, 이미 시작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을 기억하며, 하루를 시작해봅니다.


시작됐네 우리 주님의 능력이
나의 삶을 다스리고 새롭게 하네
자유하네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의 삶은 변하고 난 충만하네

은혜로다 주의 은혜
한량없는 주의 은혜
은혜로다 주의 은혜
변함 없는 신실하신 주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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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작성해보기

2009. 8. 6. 20:16 : InBox

독서노트 작성해보기

1.   1단계: 독서 정리하기

      책의 핵심단어와 메시지, 키워드를 기억하면서 읽기

n  지식의 양과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에 의해 좌우

n  한권 읽을 때마 A4 2page 정도 정리

      항상 3단계 질문을 던져라

n  a. 저자와 제목 그리고 원제를 기억

n  b. 핵심 단어, 메세지, 키워드를 다른 이에게  설명 정도로 정리

n  c. 자신의 업무에 적용할 있는 부분을 따로 정리

      읽은 책의 내용을 3 정도 반복하라

n  핵심단어, 메시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3 정도 반복

n  3개월마다 날짜 정해 다시 읽기

      책을 읽으면서 정리하라

2.   2단계: 독서노트 작성하기

      독서노트를 준비히라

      오른쪽 여백에만 기재하라

n  왼쪽은 생각나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기록

      인용한 책의 페이지를 적어두어라

      읽은 책에 일련번호를 붙여라

      일상에서 있는 비상 메모노트를 준비하라

3.   3단계: 독서노트 작성 유형

     핵심단어, 키워드, 메시지를 인용하는

     저장의 주장이나 관점을 정리하는

     방법이나 프로세스를 기록하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4.   4단계: 독서노트 활용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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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계획적으로 넓히고, 메모노트로 확장하라
 
창조적으로 일하기 위한 첫 번째 원칙은 창조적인 사고의 기반이 되는 ‘지식을 양'을 넓히고 확장하는 일이다. 창조적인 사고를 위해서 지식을 넓히고 확장하라는 것은 너무나 일반적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문제는 그냥 지식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한 달에 얼마의 책을 읽는다든지 하는 ‘계획을 가지고' 지식을 넓히고 또 그냥 확장하라는 것이 아니라 ‘메모노트라는 도구를 활용' 함으로써 확장하라는 이야기다. 일반적인 지식과 창조적인 지식이 다를 리 없지만 차이가 나는 것은 지식의 양이다. 창의적인 사고를 위해서는 일반적인 지식보다 많은 양의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10이라는 물의 양으로 물레방아를 10바퀴 돌릴 수 있다고 가정하면 물레방아를 그 이상 돌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10이상의 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창의적인 생각을 위해서는 훨씬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독서계획을 세우라

한 달에 몇 권 정도를 읽겠다는 독서계획을 먼저 세워야 한다. 지금까지 읽은 책의 양을 기준으로 설정하되 시작단계에서는 흥미를 잃지 않게 너무 지나치게 높게 잡을 필요는 없다. 너무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계획을 세웠다가는 계획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처음 시작하는 직장인의 경우에도 최소 한 달에 5권 정도라는 목표를 세워서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 독서노트를 만들어라
책을 읽는다는 것의 효과는 책을 읽은 사람과 책을 읽지 않은 사람과는 차이가 나야 한다. 그런데 많은 직장인들의 경우 책을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책을 읽을 때에는 줄을 쳐가며, 책 여백에다 기록도 해가면서 많은 정성을 들이지만 다 읽고 난후에 줄친 부분을 다시 꺼내서 읽어보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아마도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꺼내어 읽어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책을 한번만 읽고 난후 그 내용을 재생할 수 있는 비율은 10퍼센트 미만이다. 어렵사리 읽은 책에서 내용의 10퍼센트 미만을 기억하고 활용한다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이다. 예전에는 책에서 읽은 교훈만 머리에 넣고 있어도 사회생활 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으나 지금과 같은 정보홍수 시대에는 자신이 읽은 책의 핵심단어나 키워드 또는 메시지를 기억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정리해서 활용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 되었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독서노트'를 만드는 일이다.


• 주기적으로 점검하라.
독서노트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한번 정리해 놓고 이를 다시 리뷰하지 않고 끝난다면 이 역시 문제가 있다. 대개 책을 처음 한번 읽고서는 읽은 책의 내용 중 10-20퍼센트 정도밖에 재생을 할 수 없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읽는 책의 경우 재생율은 10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진다. 책 한권을 읽기 위해서 오랜 시간의 노력을 들여 읽은 책의 10퍼센트 정도밖에 재생이 안 된다는 것은 독서효율이 낮음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읽은 책의 내용을 보다 많이 기억할 수 있을 까? 읽은 책의 내용을 60퍼센트 이상 재생하고 이를 머리에 저장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 3번의 반복을 거쳐야 가능하다. 처음에 책을 읽을 때가 한번이고, 두 번째는 석 달 정도에 읽은 책의 독서메모만을 다시 읽음으로서 그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세 번째는 읽은 메모에서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정리하면서 다시 읽는 것을 반복하라는 이야기다. 즉 3개월 주기로 3번 정도를 반복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기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읽은 책의 내용을 활용할 수 있고 또 여기서 새롭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것이다.

• 메모노트를 부가하라.
사람의 머릿속은 ‘일종의 흐르는 물'과 같아서 떠다니는 것을 바로 건져놓지 않으면 금새 흘러가 버린다.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건져 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메모이다. 독서노트가 바로 옆에 없다면 책을 읽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독서노트 이외 비상메모노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메모노트는 일상생활에서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기록하는 비상수단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의식에 떠오른 일들을 부담 없이 기록하는 ‘모닝페이지'라든가 아니면 화장실에서 또는 운전하면서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정리할 수 있는 포스트잇과 같은 메모노트를 항상 준비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등산을 갈 때나 산책을 할 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떠오른 아이디어를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이를 기록할 수 있는 별도의 메모노트와 필기구를 가지고 다니라는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나 기발한 아이디어는 필기구가 준비된 곳에서만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많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필자가 많이 활용하는 메모노트는 A4용지를 호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게 3번 정도 접어서 활용하거나 포스트잇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 소설과 만화책을 읽어라.

소설이나 만화책을 읽는 것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상상력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억지로 소설이나 만화책을 읽으라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만화 등을 읽으면서 사물의 모양, 생김새, 주제 등을 상상하면서 읽는다면 창의력에도 도움이 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올 가능성도 많다. 만화나 소설을 권하는 이유는 흥미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과 스스로 상상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만화나 소설의 경우 재미있어야 읽혀지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3개월에 한번정도 만화나 소설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도 좋다.


• 흥미가 있는 분야는 다독을 하라.
책을 읽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읽기 어려운 책 , 그리고 재미가 없는 책과 같이 지나치게 폼 나는 책을 읽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책은 누구에게 어떤 책을 읽는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여 그 영역에서 새로움을 얻기 위함이다. 예를 들면 토마스 프리드만의 ‘세계는 평평하다'나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같은 책은 다른 사람에게 읽고 있다고 이야기 하기는 폼 나는 경우이지만 쉽게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 책이다. 괜히 폼 나는 책을 읽으려고 붙들고 씨름하다 포기하는 것 보다는 흥미가 있는 분야로 시작해서 독서의 양을 늘리는 것이 낫다. 그래서 처음에는 흥미 있는 분야 즉 자기계발 방법 등 자신의 미래와 관련된 흥미 있는 분야를 읽어 내려가는 것이 좋다. 자신이 재미가 있고 또 흥미가 있다면 참고문헌에 적혀있는 관련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내려 간다. 흥미가 있다면 다독을 해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축적해가는 것도 좋다.

• 업무 관련 지식의 책은 마감일을 정해서 읽어라
일반적인 자기계발과 흥미 있는 분야의 독서를 넓혀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직무와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은 직장에서의 성공과 관련이 높다. 자기계발의 목적이 관련서적을 많이 읽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 자신의 시장가치를 높이는데 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시장가치를 높이기 위한 업무관련 서적은 꼭 읽어야 할 책을 선정하여 약간의 강제성을 두는 것도 좋다. 자신이 맡은 직무나 자신이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야의 서적은 최신의 서적을 골라서 읽어야 분야의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다. 신중하게 골라야 하고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 일 단 추천을 받은 책은 독서노트에 정리하면서 정독해야한다. 이러한 책들의 경우에는 한 달에 2권정도 읽겠다는 목표를 정해놓고 또 언제까지 읽겠다는 마감일을 정해서 읽도록 한다. 업무관련 서적은 재미로 읽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메시지가 무엇인지, 새로운 아이디어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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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온 땅의 주인 되신 주님이
   내 이름 아시며 상한 맘 돌보네
   어둠을 밝히시는 새벽 별
   방황하는 내 맘 주의 길 비추시네

   (2절)
   주님은 나의 죄를 보시고
   사랑의 눈으로 날 일으키시네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듯
   내 영혼의 폭풍 고요케 하시네

   나로 인함이 아닌 주가 행하신 일로
   나의 행함이 아닌 오직 주로 인하여

   (후렴)
   나는 오늘 피었다 지는 이름 없는 꽃과 같네
   바다에 이는 파도, 안개와 같지만
   주는 나를 붙드시고 부르짖음 들으시며
   날 귀하다 하시네 나 오직 주의 것

   (Bridge)
   그 누구도 두렵잖네 나 주의 것
   주의 것

  (Verse 1)
   Who am I that the Lord of all the earth
   Would care to know my name, would care to feel my hurt?
   Who am I that the Bright and Morning Star
   Would choose to light the way for my ever wand’ring heart?

   (Verse 2)
   Who am I that the eyes that see my sin
   Would look on me with love and watch me rise again?
   Who am I that the voice that calmed the sea
   Would call out through the rain and calm the storm in me?

   Not because of who I am,
   But because of what You’ve done.
   Not because of what I’ve done,
   But because of who You are,

   (Chorus)
   I am a flower quickly fading,
   Here today and gone tomorrow,
   A wave tossed in the ocean, a vapor in the wind.
   Still You hear me when I’m calling.
   Lord, You catch me when I’m falling
   And You’ve told me who I am:
   I am Yours. I am Yours.

   (Bridge)
   Whom shall I fear; whom shall I fear?
   ‘Cause I am Yours. I am Y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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